[시승기]
뚜껑 열리는 뉴트리아? BMW 420i 컨버터블과 마법 같은 순간
컨버터블은 꼭 한 번은 소유하고픈 자동차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 유럽 출장 때였다. 파리의 상제리제 거리를 지날 때였나, 바다가 바라보이는 니스의 도로에서였나. 이제는 희미한 기억인데도 그 장면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차 한 대가 지나갔다. 백발의 신사가 컨버터블을 타고 지붕을 연 채 유유자적 좌회전을 했다. 이상하게 그 순간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껴졌다. 가지런한 백발의 신사, 가죽 질감이 도드라지는 실내, 그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 풍경으로 지나가는 베이지색 건물들.
완벽하게 로망을 자극하는 장면이었다. 언젠가 저 백발의 신사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 아니 돼야겠다는 각오가 차올랐다. 그 장면에서 컨버터블은 시작이자 끝이었다. 물론 백발의 신사와 화창한 날씨, 유럽 거리 풍경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 자동차가 컨버터블이 아니었다면 얘기가 안 되니까. 그때부터였다. 컨버터블은 자동차가 줄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감흥 그 자체였다. 백발의 신사가 햇살을 만끽하며 유유자적 좌회전하는 자동차. 그런 여유와 풍요를 상징했다. 그냥 자동차가 아닌 상상을 부르는 오브제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 마음 변함없다.
BMW 420i 컨버터블을 앞에 두고 그때 그 장면이 떠올랐다. 물론 난 백발의 신사도 아니고, 이곳은 당연히 유럽도 아니다. 하지만 언제든 속살 드러낼 수 있는 소프트톱을 품은 컨버터블은 눈앞에 있다. 로망을 이루진 못해도 잠깐 맛볼 기회다. 역시 뉴트리아 그릴로 불리우는 수직 키드니 그릴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여전히 낯설다. 그럼에도 컨버터블이기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소프트톱이 눈길을 더 사로잡으니까. 덕분에 차체 비율에 더 집중할 수도 있다. 소프트톱은 보닛에서 지붕과 엉덩이로 이어지는 매끈한 선의 포인트로서 시선을 잡아끈다. 그러고 보면 컨버터블이라서 수직 키드니 그릴이 사뭇 웅장해 보이기도 한다. 소프트톱의 고풍스러움이 수직 키드니 그릴을 저택의 대문처럼 조화롭게 한달까. 역시 쿠페보다 컨버터블.
목적지를 영종도로 잡았다. 이렇게 화창한 초여름날, 그것도 평일이라면 한적한 오픈 에어링을 즐기기에 그곳만 한 곳도 없다. 일단 서울에서 가깝다. 탁 트인 도로도 즐비하다. 무엇보다 섬이라는 비일상적 환경이 펼쳐진다. 셋 다 만족시키는 코스는 별로 없다. 영종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달리는 즐거움을, 도착해서는 오픈 에어링의 여유를 즐기려고 한다. 그러니까 420i 컨버터블의 양면성을 선명하게 즐길 수 있는 맞춤 코스. 구성이 좋으니 출발 전부터 괜히 설렌다.
시내를 통과해 강변북로에 진입했다. 짧은 거리지만 420i 컨버터블의 남다른 성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세단처럼 편안하면서 쿠페만의 양념을 잘 버무렸다. 4시리즈의 탄생 배경처럼. 일단 자세가 세단보다 본격적이다. 시트가 도로와 가까울수록 잘 달리는 자동차의 자세를 연출한다. 차체 외관으로 연출할 수 없는 운전 감각 얘기다. 달리는 맛을 살리는 자세를 놓치지 않았다. 본질에 집중해 차별화하며 신경 썼다는 얘기다.
420i 컨버터블의 시트에 앉자마자 바로 느껴졌다. 차체도 낮고, 시트도 낮다. 낮은 자세에서, 보이는 시야에서, 빨리 달리지 않아도 쿠페의 날렵한 감각이 풍긴다. 두툼한 스티어링 휠에 전해지는 민첩함 또한 그 감각을 배가한다. 앞머리가 생기발랄하게 움직인다. 출력과는 상관없는 감각의 영역이다. 사실 420i 컨버터블의 출력은 무난하다. 쾌적한 편이지만 짜릿함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운전석에선 느끼는 감각은 제법 날카로워 무난함을 잊게 한다.
속도야 엔진 회전수 높게 쓰면 수직 상승하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감각이다. 소프트톱이기에 무게 중심이 더 낮은 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교통량이 줄어들수록 패들시프트에 손이 자주 갔다. 기어 단수를 내릴 때마다, 낮은 기어를 물고 있을 때마다 무난한 출력에도 찌릿, 운전하는 맛이 살아났다. 운전하는 즐거움은 고속과는 무관하다. 차선 변경하는 순간에도 짜릿한 감각이 전해진다. 도로와 도로를 잇는 램프 구간에서도 쾌감은 퍼진다. 420i 컨버터블은 그럴 수 있는 몸놀림을 보여준다. 패들시프트를 더 적극적으로 쓰는 재미는 덤이다.
그러면서 편하다. 컴포트모드로 놓고 달리면 여느 세단의 안락함이 실내에 퍼진다. 소프트톱이라 짐짓 걱정한 소음도 없다. ‘페이퍼 허니콤’이라는 친환경 소재로 소프트톱을 보강했다. 밀폐력과 강도를 높이면서, 주재료가 종이라 무게 부담도 덜었다. 역시 신경 쓴 만큼 효과적이다. 이런 세심함이 안락함을 조성한다. 무엇보다 품이 넓어진 하체를 빼놓을 수 없다. BMW가 서스펜션을 세팅하는 솜씨는 날이 갈수록 정교해진다. 부드러움과 탄력의 비율이 맛깔스럽다. 여전히 운전할 때 즐겁고, 갈수록 승차감은 안락하다. 420i 컨버터블 역시.
이제 소프트톱을 열 때다. 개폐 버튼을 누를 때마다 괜히 떨린다. 어릴 때 변신 로봇의 변신 장면에서 두근거린 것처럼. 18초의 황홀함이랄까. 소프트톱이 다 열리면 주변 풍경이 실내로 와락, 들어온다. 완전히 다른 차를 탄 기분으로 출발. 빨리 달릴 필요는 없다. 한적한 도로를 유유자적 달리면 컨버터블만의 쾌감이 극대화한다. 게다가 섬 아닌가. 해안가의 북적임, 갈매기 소리, 짭조름한 공기가 들고 난다. 비록 한국 해변은 어수선하기로 유명하지만 뭐 어떤가. 마음만은 이미 캘리포니아 도로를 달리고 있다. 마침 날도 좋다. 선글라스에 부딪혀 부서지는 햇살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부드러운 바람 또한 흥을 돋운다. 머리를, 귀를, 목덜미를 간질이며 이 순간을 더욱 또렷하게 새기게 한다. 시각과 촉각의 콤비 플레이.
이때 청각이 빠질 수 없다. 유유자적 달리더라도 주행모드는 스포츠로 바꾼다. 지붕을 연 만큼 배기음이 극적으로 증폭한다. 지붕 닫았을 땐 고속으로 달려도 조용하던 실내였다. 같은 자동차라고 믿을 수 없는 화끈한 변화다. 이제야 시각, 청각, 촉각이 어우러져 완전히 다른 환경을 조성한다. 컨버터블만이 줄 수 있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모터사이클을 탄 이후로 컨버터블에 좀 심드렁해졌다. 모터사이클만 한 개방감은 없으니까. 하지만 타보니 컨버터블은 성질이 또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보다 고풍스럽고, 지극히 풍요로운 개방감. 420i 컨버터블을 타니 기억 속 장면이 더욱 선명해졌다. 당시의 공기와 햇살까지 느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역시 컨버터블은 어떤 곳이든, 어떤 길이든 낭만적 여정을 선사한다. 상상하며 달리게 한달까.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영종도에서 420i 컨버터블 함께한 시간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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